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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혈연 아닌 ‘유대’…새로운 가족을 허하라

나윤석 기자 | 2022-09-16 09:30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가족을 구성할 권리
김순남 지음 | 오월의봄

“동성커플 등 다양한 관계 인정
친밀성 바탕한 공생 보장해야”

돌봄생태계 구축은 외면한 채
저출산만 초점맞춘 정책 비판
“국가가 인식 변화를 못따라가”


“새로운 시민적 유대를 가로막는 핵심에 가족주의가 있다.” 김순남 가족구성권연구소 대표의 ‘가족을 구성할 권리’는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한다. 나날이 늘어가는 1인 가구와 비혼 인구는 ‘정상 가족’ 신화가 이미 해체됐음을 보여준다. 하지만 가족 범위를 제한하거나 신혼부부 중심인 법률과 제도는 여전히 전통적 가족주의에 머물러 있다. 여기엔 혈연·결혼으로 묶인 이성애 가족 모델에서 벗어난 삶은 위험하고 불온한 일탈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제목으로 표현된 ‘가족구성권’은 1948년 유엔 세계인권선언에서 처음 제시된 개념으로 모든 사람이 원하는 가족 공동체를 구성하고, 차별 없는 지위를 보장받을 수 있는 권리를 뜻한다.책은 동거 중인 이성·동성 커플, 친구와 주거 공간을 공유하는 사례 등을 통해‘혈연’이 아닌 ‘친밀성’을 바탕으로 한 유대의 가능성을 모색한다.

결혼한 여성이 호적을 바꾸도록 강제해 친가에 대한 모든 법적 권리를 상실하게 하는 호주제는 시대착오적 제도라는 비판 속에 지난 2007년 폐지됐다.

하지만 호주제 폐지 과정에서 생겨난 민법 779조는 제도적 차별을 여전히 뒷받침하는 토대가 되고 있다. 혈족으로 가족 범위를 제한한 조항 탓에 실질적 생활 공동체가 법적 보호를 받지 못하는 것이다.

일례로 주택청약제도의 노부모 부양 특별공급은 민법이 규정한 직계혈족만을 대상으로 한다. 이 때문에 실제 노부모를 부양하고 있으며 주민등록등본에 함께 등재돼 있어도 직계혈족이 아니면 특별공급 지원 자격을 얻지 못한다. 지난해 2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38년을 모셨는데 계모라서 특별공급이 취소됐다’는 사연은 제도의 이런 어처구니없는 빈틈을 드러낸다.

민법의 협소한 규정은 개인의 결정권 침해로도 이어진다. 한국의 연명의료결정법은 환자가 연명의료를 결정할 능력이 없는 경우 법이 규정한 자가 환자를 대신해 연명의료 여부를 결정하도록 허용하는데, 혈연이나 가족으로 엮이지 않은 동반자는 이 결정에 전혀 개입할 수 없다. 미국의 관련 법이 친구나 가까운 친척, 존경하는 지인 등 환자가 미리 지정한 사람이면 누구나 연명의료 여부를 선택할 수 있게 한 것과 대비된다.

팬데믹(감염병 대유행) 이후 처음 도입된 가족돌봄휴가의 적용 대상 역시 민법이 규정한 가족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책에 소개된 동거 커플, 수십 년 동안 ‘상호돌봄’의 책임을 나눠온 ‘친구 가족’은 돌봄을 받을 권리도, 돌봄을 수행할 권리도 얻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저자는 “삶에서 중요한 관계란 결코 고정돼 있지 않은데 혈연과 결혼으로 고정하는 제도가 관계의 불안정성과 사회적 배제를 낳는다”며 “연대의 토대를 확장하기 위해 ‘내가 지정한 1인’이 가족으로 인정되는 제도적 변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사회 기본 단위를 가족이 아닌 시민 개개인으로 상정하고, ‘가족같이’ 친밀한 관계를 폭넓게 보장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국가의 비전이 시민들의 인식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각종 통계는 1인 가구나 비혼 인구가 단순히 경제적 부담을 이유로 ‘정상 가족’을 꾸리지 않는 게 아님을 보여준다. 이들은 가족주의와 기꺼이 ‘불화’하며 자기 자신으로 살고자 하는 의지로 자신만의 생애 경로를 만들어간다. 하지만 국가는 아직도 ‘시민들이 결혼할 조건만 되면 결혼할 것’이라는 프레임에 사로잡혀 있다. 아프고 늙어도 서로에게 의존하는 몸으로 사는 것이 가능한 돌봄 생태계 구축엔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저출산 해소에 초점을 맞춘 인구·가족 정책만 쏟아낸다. 수십조 원을 투입해도 오르지 않는 혼인율과 출산율은 이런 괴리에서 비롯된다.

저자는 이성애 가족을 모델로 삼는 정책이 ‘선(先) 가정, 후(後) 사회보장’으로 요약된다고 지적한다. 상호의존과 돌봄의 책임을 가족에게 떠넘기면서 “가족이 먼저 알아서 책임지고 난 뒤 죽을 만큼 힘들면 그제야 사회가 관여하는” 상황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국가는 인구 감소를 심각한 위기로 규정하지만, 시민들은 우리 삶을 인구로 바라보는 국가의 태도가 위기라고 생각한다.”

책에는 30대부터 60대까지 여러 세대가 어우러지는 주거 공동체를 만든 K 씨 사례가 나온다. 저자가 직접 만난 K 씨는 “노모에게 긴급한 상황이 생겼을 때 도움을 요청할 관계가 절실했다”며 이렇게 털어놓는다.

“우리는 남한테 폐를 끼치는 걸 엄청난 잘못으로 인식하잖아요. 하지만 인간은 불완전하고 서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 아닌가요.” 저자는 K 씨 사례를 통해 가족주의를 넘어서는 공생을 위해선 우리 모두가 어느 시점엔 돌봄에 기댈 수밖에 없는 ‘잠재적 의존인’이라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가족과 남을 구분하는 ‘분리된 공동체’가 아니라 섞이고 의존하는 ‘오염된 공동체’는 피가 섞이지 않은 타인과 연결되려는 의지가 보호받을 때 비로소 실현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저자의 한 줄 요약처럼, 가족을 구성할 권리를 성찰하는 것은 가족 ‘바깥’에서 가족주의에 저항하는 투쟁이자 고유한 ‘개인-되기’를 실천하는 정치적 여정이다. 192쪽, 1만3800원.

나윤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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